[인터뷰] 방위사업청 원가검증팀장 정재민 전 판사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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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방위사업청 원가검증팀장 정재민 전 판사의 이야기
  • 김주미 기자
  • 승인 2017.07.05 1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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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직함떼고 내이름 석자 무게로 살고싶었다”
스케일 큰 행정부 일에 매력...“재미, 보람 커져”
세계문학상 수상,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 발탁도
ICTY에서 재판연구관..“전쟁참상에 느낀 것 많아”

[법률저널=김주미 기자] 직장을 옮긴다는 것이 언제나 특별하게 주목받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올 초, 한 판사가 방위사업청으로 이직했다는 소식은 거의 모든 주요 일간지가 실어나를 정도로 화제가 됐다.

현재 방위사업청 원가검증팀에서 일하고 있는 정재민 팀장은 법조인 경력 16년에 판사 생활만 11년을 했었던 전직 법관이다.

그의 이직도 독특하지만 판사 생활 동안 그가 쌓아 온 이력도 평범하지만은 않다. 독도와 국제사법재판을 소재로 하여 집필했던 그의 역사추리소설로 인해 외교부 장관이 그를 직접 발탁,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으로 보했던 것.

국제법을 전공한 그는 국제사법재판소가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년 넘게 재판연구관으로 근무하기도 했었다.
 

 

지난 달 20일, 법률저널이 과천에 위치한 방위사업청 대변인실에서 정재민 팀장을 만났다. 막 회의를 마치고 나와 반갑게 기자들을 맞이한 그의 표정에는 기분좋은 생동감이 어려 있었다.

그가 법복을 벗고 새로운 직장에 들어선 이유, ‘판사’라는 직업에 대한 그의 생각과 법관으로서 경험했던 업무들에 대한 소회, 활자들을 모아 소설이라는 양식으로 풀어내는 것에 대한 사연까지, 그는 이 풍성한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풀어냈다.

- 지난 2월 9일자로 16년 법관 생활을 마치시고 방위사업청 원가검증팀장으로서 행정관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조금은 남다른 선택을 하셨는데요.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 연유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법복을 벗기로 결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판사직이 싫어서 그만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게 너무 과분한 자리였어요. 판사라는 이유만으로 과한 대접을 받으면서 실제보다 더 반듯한 사람인 것처럼 신뢰받았죠. 판사직 자체만을 놓고 보면 많은 장점이 있어요. 그러나 단지 장점만 있는 것도 아니었죠. 판사가 장점만 있었더라도 한 번 사는 인생을 판사로만 살아보고 끝내는 것은 아쉬웠을 거예요. 무엇보다 판사라는 직업 자체가 내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기보단 부모님의 바람으로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그 땐 나만의 길을 혼자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심지가 여물지 못했거든요.

일본 근대소설의 아버지 나쓰메 소세키는 영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교토대 영문과 교수직을 거부하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면서 친구에게 이 같은 편지를 쓰죠. 저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재판연구관으로 있던 시절, 이 구절을 수십 번 고쳐 읽었습니다.

“유학에서 돌아오는 길에 결심했네. 다시는 지금까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내 스스로가 얼마나 위대한지 시험해 볼 기회가 없었네. 스스로를 신뢰한 적이 없었네. 이제는 내 혼자 힘으로 가는 데까지 가다가 막다른 골목을 만나면 거기서 쓰러지겠네”

내가 그동안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안전한 일만 좇은 것이 ‘내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스로를 신뢰한 적이 없었네”라는 말이 정곡을 찔렀어요. 동시에 그동안 믿어주지 못했던 내 자신에게 미안해지더군요. 마침 나이 마흔을 맞이하는 남다른 각오로, 이제는 내 자신을 믿어주는 결정을 내리기로 했습니다. 나도 헤이그에서 귀국하면 다시는 이전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고, 남은 절반의 인생을 오로지 ‘나’로서 살아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내 이름 석자보다 비대한 꼬리표인 ‘판사’라는 직함부터 떼어 냈습니다. ‘정 판사’가 아닌 ‘정재민’으로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 판사직에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점들인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쌍방으로부터 거짓말이 난무하는 법정이지만 판사만큼은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죠. 일과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려고 동료를 속인다거나, 직업을 잃을 것이 두려워 윗사람에게 굽실거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 내 자신을 속일 필요도 없었죠. 법과 양심에 따른 판단이 헌법상 보장돼 있으므로 판결문에는 내가 실제 믿는 그대로를 적으면 됐습니다. 경력이 같은 다른 공무원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았고, 타인으로부터 괴롭힘이나 무시도 쉽게 당하지 않았습니다. 세계문학전집보다 더 생생한 당사자들의 삶의 모습과 비밀을 직접 들을 수도 있었죠.

그러나 기쁜 일로 재판을 받으러 온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을 감옥에 보내고, 부부를 이혼시키고, 자식의 양육권을 어느 한쪽에만 주고, 재산을 빼앗거나 회사를 파산시키는 일들을 내 손으로 해야 했어요. 일이 재밌을 수가 없었죠. 그렇게 손에 피를 묻힐 때마다 내 가슴에도 무수한 흠집이 남았습니다. 정답이 없는 문제가 많은데 어떻게든 답을 내려야 했고, 검은 법복 속에 나를 감춘 채 생각까지 평균인의 상식에 끼워 넣어야 했어요. 갈수록 여유가 없어지면서 늘 시간에 쫓겼죠.

- 특별히 방위사업청으로 이직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이직하신 지 넉 달 정도가 됐는데, 새 직장에서의 포부가 있으시다면?
 

 

행정부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진즉부터 있었습니다. 법무관 때 국방부 정책실의 유일한 법무관으로 2년 근무하면서 용산기지 이전을 비롯한 굵직한 국가적 사업의 법무검토나 국제회의 참가 등을 한 경험이 있었고, 외교부에서도 2년을 근무했었습니다. 도합 4년 동안 정부중앙부처에서 근무해보면서 “(행정부의) 일의 스케일이 크고, 해결책에 정답이 없이 다양한 접근을 할 수 있어 보람과 재미가 크겠다”는 생각을 해 왔죠. 그러던 중 마침 방위사업청에서 팀장 직위를 계약직이 아닌 정규직으로 선발하는 것을 보게 됐고, 공고 난 뒤에도 오랜 시간 고민은 했지만 결국 지원해서 시험치고 면접 본 후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방위사업청은 안보와 산업 모두에 영향을 미치고 연 14조 원의 예산을 쓰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우리 군이 필요한 무기나 장비를 자체적으로 개발하거나 국내외에서 구입하는 기관이죠. 또한 국내업체가 만든 무기를 외국에 팔 수 있도록 활로를 개척하는 일도 합니다. 방위사업청은 정무적, 추상적 담론만 다루는 다른 부처와 달리 구체적 성과가 무기나 장비로 눈에 보인다는 것도 매력적입니다. 외교, 안보, 법률, 국제, 경제, 회계, 과학 등 평소 제가 관심을 가지던 분야가 모두 얽혀있는 영역이라는 점도 끌렸죠.

방위사업청 입장에서는 내 이력이 특이한 만큼 전문성과 공정성 측면에서 기여할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봅니다. 방위사업청은 계약과 같이 매우 법률적인 일을 다루는 기관이므로 법률가가 팀장이 되면 일의 처리속도와 합법성이 제고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진급과 평판에 인질 잡히지 않고,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며 옳은 일은 실현시키도록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책임지기를 회피하지 않는 그런 양심적인 공직생활을, 할 수 있는데까지 한 번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 업무적인 측면에서 비교를 해봤을 때, 이전과 어떤 점들이 달라졌나요.

관료가 되어 일하는 방식은 판사 때와 확연히 틀립니다. 판사는 정의를 위해 일하지만 관료는 국익을 위해 일하고, 판사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초점을 맞추지만 관료는 앞으로 일구어 내야 하는 성과에 초점을 맞춥니다. 판사는 혼자 일하고 혼자 판단하지만 관료는 팀으로, 또 관련 부서와 함께 일하는 점도 다르죠. 판사 때는 시민 개개인의 개별적 사건을 다루었다면 여기서는 수천억, 수조 원에 이르는 국가적 사업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존에 법조인으로서 16년 동안 일하고 생각해왔던 방식을 최대한 많이 바꿔보고 싶었는데 실제 그런 경험을 하게 되어서 현재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여기 일이 훨씬 더 재밌고 보람있고 해결방식도 다양해서, 제게는 더 잘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판사 때보다 야근이 적어지면서 시간적 여유가 많이 생겨 퇴근하면 읽고 싶었던 책들고 읽고, 가족들과 시간도 더 많이 보내고 있습니다.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기도 하고요.

- 문학상을 두 번 받으신 것도 눈에 띄는 이력입니다. ‘소설 이사부’는 2010년 매일신문주최 포항국제동해문학상을 수상했고, ‘보헤미안 랩소디’로는 제10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하셨어요. 이례적으로 현직 판사로서 외교부 독도법률자문관으로 스카웃 된 것은 소설 ‘독도 인더 헤이그’가 결정적이었는데요. 팀장님의 소설에 대한 말씀도 듣고 싶습니다.

문학상을 두 번 받았다고 하니 제가 소설만 쓰는 것으로 아는 사람도 있는데 판사생활 11년 동안 쓴 것이 두 편이고, ‘소설 이사부’는 넉 달, ‘보헤미안 랩소디’는 반 년 정도 주말에만 틈틈이 썼습니다. 소설 세 권 낸 것 중 두 권은 장편문학상을 받았고, 한 권(독도 인더 헤이그)은 그것으로 오페라가 만들어지고 드라마 판권이 팔리고 저는 외교부로 초청까지 받았으니 보람이나 결실이 분에 넘치게 컸지요.

이렇게 말하면 문학적 재능이 있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작가들은 학창시절부터 각종 백일장을 휩쓸면서 문명(文名)을 날렸다고 하던데 저는 글 써서 상 받은 적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결실이 컸던 이유를 생각해보니 첫째는 운이 좋았기에 작품 수준보다 큰 상을 받은 것이고, 둘째는 전업작가가 아니라서 정말 쓰고 싶을 때만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꼭 쓰고 싶은 글감이 나타날 때까지, 그리고 그 글감에 대해 할 말이 많이 쌓일 때까지 기다릴 수 있고, 또 기다릴 수밖에 없죠.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헤세의 ‘유리알유희’ 때문입니다. 학창시절 독서광은 아니었어도 헤세의 책은 쭉 읽었는데, 그 때는 이상하게 책 좀 안다는 학생들이 폼으로라도 헤세의 책을 읽던 분위기였습니다. 데미안, 싯다르타, 수레바퀴 아래서, 지와 사랑, 크눌프 등. 이러한 헤세 시리즈의 종결자가 바로 ‘유리알유희’였죠. 이 소설은 예술, 철학, 종교 등 모든 정신문화가 ‘유리알유희’로 통합된 미래의 어느 세대에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라는 소년이 음악, 철학, 기호학, 종교 등에 대한 수련을 거치면서 전 세계 사람들의 정신적 향유를 위해 유리알유희 연기를 선보이는 연기자가 되는 일대기입니다.

저는 당시 대입을 앞두고서 시간을 쪼개 그 어려운 책을 고생하며 읽었는데 ‘유리알유희’라는 제목의 뜻조차 모르겠더군요. 그것이 억울해 오기로 일곱 번을 거듭 읽어 보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을 대학교 3학년 때 독일어 수업시간에 교수님께 여쭤보고서야 알게 됐죠. “유리알유희가 무엇입니까”라고 여쭙자 교수님은 주저없이 “‘소설’이야. 헤세는 소설지상주의자였어. 소설이 모든 예술을, 예술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를 아우를 수 있는 통합적인 양식이라 본 거지”라고 하시더군요. 듣고 보니 그럴 듯 했고, 나도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날로 큰 노트를 한 권 사서 소설 습작을 시작했습니다. 해보니까 이게 어렵긴 해도 의외로, 또 은근히 재미가 있었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머리를 식힐 생각으로 시간 나면 끄적이던 것이 언젠가부턴 소설을 쓰다 머리를 식히려고 고시 공부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고시준비 기간에 썼던 단편소설을 사법연수생이 되고서 제1회 공무원문예대전에 냈는데, 장려상을 받았습니다. 정말 기뻤어요. 내게 실리적으로 이득이 되지 않는데, 남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내 시간을 쪼개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완성해 낸 경험이 ‘나의 삶을 살았다’는 환희의 기분을 안겨준 것 같습니다. 그 때의 ‘장려상’으로부터 장려된 것이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으로 계시던 2년 동안은 어떤 일들을 맡으셨나요?

외교부 국제법률국에서 영토법률자문관으로서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국제소송 등에 관여했습니다. 일본 의원들이 독도를 방문하겠다면서 우리나라에 들어오려다 입국금지를 당한 일, 헌법재판소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법적 의무를 정부에 부과하는 결정을 내려 외교부가 협상을 시도하던 일,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고 이에 일본 정부가 국제사법재판소행을 제안한 일, 대법원이 강제징용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이 살아있다는 취지로 판결한 일 등 한일관계를 뒤흔든 일들이 제가 외교부에 있을 때 다 일어났습니다.

저는 당시 함께 일한 외교관들이 이런 일을 처리하면서 정말 고민과 고생을 많이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외교란 상대국이 있는 일이라 우리가 원하는 대로만 할 수가 없어 국민들이 원하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수준에는 미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외교부 안에서 목격한 다수의 외교관들은 그래도 아직 상당히 높은 수준의 애국심과 책임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외교부에 간 것은 법원에서도, 외교부에서도 전례 없던 시도고 그만큼 나라로부터 혜택을 입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교부에 있는 동안 각국의 국제소송을 연구해 대외비 책을 쓰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의뢰로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또 국제법학회지에 독도영유권이나 위안부 관련 논문도 발표했죠. 그러나 아직도 갚아야 할 빚이 더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기회가 되면 그동안 틈틈이 해놓은 역사적 권원과 같이 영유권에 관한 보다 근본적 법리에 대한 연구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해보고 싶습니다.

- 2014년 가을부터 1년 4개월 동안은 네덜란드 헤이그의 ICTY에서 재판연구관으로 계셨습니다. 가게 된 계기와 그 곳에서 특별히 느낀 점들이 있다면 무엇인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법원에서 7년 간 해마다 공모절차를 통해 판사 한 명을 선발해서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ICTY에 재판연구관으로 파견을 보냈는데, 제가 그에 해당하는 마지막 멤버였습니다. 한국 판사들에게 국제재판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미래의 국제재판관이나 국제법 전문가로 키우고자 하는 취지였죠. 일찍부터 ICTY에 계셨던 권오곤 재판관님과 법원이 그렇게 아이디어를 내고 배려 해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ICTY의 네 분의 재판관님들 밑에 세계 각국에서 온 열댓명의 법률가로 구성된 법률팀이 있는데 저는 그 중의 한 명으로서 일했습니다. 판결문 초안을 쓰거나 초안 작성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 분석하는 일을 했죠. 세계 각국의 유능한 법률가들과 생활하면서 법률적으로는 물론 판단력, 인품, 처신, 다양하고 기발한 생각들도 다양하게 배우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곳에서 간접적이나마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우아하고 품격 있는 ICTY 재판소 건물 안에 인간이 인간을 처참하게 도륙한 사건 기록들이 끝없이 쌓여 있었습니다. 학교 교실만한 공간에 수백명을 빽빽하게 밀어넣고 식량도, 용변도 허용하지 않아 목이 마른 사람들이 차오른 오줌을 마신 사건들, 몇일 동안 때리거나 성폭행을 해 모조리 죽인 사건들, 포크레인으로 여러 개의 커다란 구덩이를 파놓고 그 앞에 사람들을 세워놓은 뒤 총을 쏘아대 구덩이 하나 당 발견된 시체가 수백에서 수천 명이 넘는 사건들, 버스에 사람들을 몰아넣은 채 밖에서 기관총을 난사해 죽인 사건 등...

이러저러하게 구 유고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죽인 숫자가 20만 명이 넘습니다. 사망자가 24만명이었다는 한국전쟁의 참상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런 일들이 미개한 시대도 아닌 불과 20년 전에, 그것도 문명의 중심이라는 유럽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시체들을 분석한 보고서들을 읽으면서, 언덕에 가득 쌓인 해골들 사진을 보면서, 대여섯 살 어린이들의 시체를 보면서, 저는 ‘내 아이들이 살아있는 동안 전쟁을 겪어 저런 일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지곤 했습니다. 나아가 우리 한반도가 어떻게 이런 참상이 재발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저도 모르게 계속 생각하게 됐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전쟁을 사전에 실효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것은 강력한 군사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법 또한 야만적인 인간의 본성을 이성과 문명과 정의에 복종시키려는 시도들 중 하나지만, 국제사회에서의 법이란 한계가 있습니다. 집행력이 제한되고 사후적으로만 조치를 취할 수 있을 뿐이죠. 국제법을 전공한 판사가 국제재판소까지 가서 ‘국제사회에서는 법보다 군사력의 위력을 실감했다’고 하면 좀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저의 솔직한 인상이었습니다. 그런 인상이 제가 방위사업청으로 이직하는데 어느 정도 작용한 것도 사실입니다.

인터뷰 김주미 기자, 사진 이인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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