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조급하고 탐욕스런 미래예측 망상가들, 닥터 지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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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조급하고 탐욕스런 미래예측 망상가들, 닥터 지바고
  • 오시영
  • 승인 2018.06.22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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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서둘러 미래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없다. 현재를 살지 않고 미래를 사는 뜬구름 같은 사람들이 현재를 지배하려 한다. 미래를 사는 이들이 넘쳐나면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모두 허공에 발을 딛고 사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현재만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교육은 미래에 희망을 가질 것을 가르친다. 그것도 아주 강하게 가르친다. 그러다 보니 많은 지식인들이, 아니 평범한 일반인조차 현재를 살기보다는 장밋빛 미래를 설계하고 미래를 잘 살겠다고 몸부림치며 현재를 도외시하는 이상한 경향에 사로잡혀 있다. 미래에 치중하는 삶은 현재라는 실존을 하찮게 여기게 된다. 극단적으로는 현실을 부정하게 되고, 오직 미래만이 희망이라며 존재하지 않은 미래를 사는 상상의 세계에 스스로를 가두고 스스로를 모순적 인간으로 잘못 팽창시킨다. 그래서인지 미래예측시스템이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는 빅브라더시대에서 한국인은 유독 미래에 민감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지방선거가 끝나자 차기 대선 후보군이라는 여론조사결과를 놓고 수많은 종편과 지상파 방송에서 야단이다(필자는 참 미친 짓거리라고 생각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1위라는 둥, 김경수 경남도지사 당선자가 2위이고 이재명 경기도지사 당선자가 3위라는 둥, 거의 4년 뒤에 치러질 차기 대통령선거를 대서특필하고 있다. 아예 배지 않은 아이를 낳으라는 꼴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는 2017년 5월 10일부터 2022년 5월 9일까지이다. 아직 4년 가까운 세월이 남았다. 불과 임기의 5분의 1 정도를 마친 대통령의 후임이 누가 될 것인지를 놓고 임기의 5분의 4나 되는 긴 기간 동안 계속해서 떠들고 싸우겠다는 것인가? 그 떠듦의 대열에 숟가락 하나 얹지 못하면 전문가 대열에서 도태될 것처럼 안절부절하거나 불안해하며 난리를 칠 것이다. 4년 뒤에 올 첫차를 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4년 뒤에 살아 있을지 자체가 불투명한 인간들의 하는 짓이다. 오늘이라는 운명 속 현실에 충실하기 보다는 4년 뒤를 꿈꾸는, 아니 좋게 말해 꿈일 뿐 4년 뒤의 아지랑이를 움켜쥐겠다고 설레발을 쳐대는 사람들의 조급증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이 얼마나 저급한 욕망들인가?

이번 지방선거 과정 중에서 가장 큰 홍역을 치른 이는 아마 이재명 경기도지사 당선자일 것이다. 그의 행정능력이나 당선 후 실천해나갈 공약에 대한 검증보다는 가족(형수)에 대한 욕설 파문과 모 연예인과의 사적 관계를 둘러싼 사생활시비가 끊이질 않고 그를 괴롭혔다. 공인이 되고자 하는 자로서 당연히 겪어야 할 과정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심하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끊임없는 비판이 그에게 가해졌고, 끊임없는 해명이 반복되었다. 그런 와중에서 그는 경기도지사로 당선되었고, 그의 임기는 곧 시작될 것이다. 어찌 보면 그의 가족 욕설 파문과 연예인 스캔들은 그에게 치명적 약점이 되었겠지만, 이번 선거과정을 통해 그러한 그의 약점들이 걸러짐으로써 경기도지사 당선이라는 1차적 관문을 통과(?)하였으므로 다음 선거에서 그는 훨씬 다행스러울지도 모른다.

과거의 자유연애 기억으로부터 인간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지극히 보수적인 사람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일생 동안 단 하나의 사랑만이 존재하는 그런 사랑을 최고의 사랑으로 칠 것이다. 그런 사랑을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사람들의 교과서적인 삶은 너무 갇힌 세계여서 오래 보고 있으면 숨이 막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지극히 극소수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극소수는 도덕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비난할지도 모른다. 어찌 자기들처럼 살지 않느냐며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감정의 물결에 휩싸일 수 있기 때문에 일생을 되돌아보면 수없이 많은 사랑 감정을 느끼며 살게 마련이다. 거의 대부분의 문학작품이나 영화나 드라마 속 사랑은 변해가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고, 독자들은 그러한 변해가는 사랑에 공감하거나 하지 않거나 한다. 그런 감정들을 법으로 다스리겠다는 것이 간통죄였지만, 성적 자기 결정권이라는 현대인의 의식 변화 속에서 2015년 2월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의해 간통죄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간통죄 위헌결정 이전에 혼인빙자간음죄의 위헌 결정이 있었다. 혼인빙자간음죄라 함은 혼인하겠다고 약속하며 성관계를 맺어 놓고 나중에 혼인하지 않겠다는 자를 형사처벌하는 범죄였다. 형사처벌하겠다고 하는 중에 결혼하자고 하면 처벌하지 않은,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우스꽝스러운 범죄였다. 하지만 2009년 11월에 헌법재판소는 싫어지면 부부도 이혼하는 판에 하기 싫은 혼인을 억지로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 등에 반한다는 이유로 위헌결정을 내렸다. 혼인빙자간음죄와 간통죄가 단순히 형법 개정을 통해 폐지된 것이 아니라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을 통해 각각 폐지되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개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에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 되고, 극히 제한적인 사적 영역에 속한 문제라는 점을 명확하게 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성적 자기 결정권에 대해 아직 사회의 일부가 그러한 의식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여전히 위헌 결정 전의 사고에 고정된 이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가치는 배우자 있는 자의 그러한 성적 자기 결정권에 의한 독단적 행동은 행위자의 측면에서는 성적 자기 결정권의 행사일지 모르겠지만, 부부의 민사상 정조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불륜이고 반사회질서행위이므로 도덕적 잣대를 엄격하게 적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공직에 취임하려고 하는 자는 더욱 그러한 잣대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과거 때문에 그 사람은 아주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의 위와 같은 결정은 성적 자기 결정권에 대한 비판은 오로지 그의 배우자만이 할 수 있고, 다른 이들은 이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전에야 그러한 일탈행위가 간통죄나 혼인빙자간음죄라는 범죄행위였기 때문에 공적으로 비난할 개연성이 있었지만, 이제는 사적 영역으로 축소되어 국가 형벌권의 대상이 되지 않음으로써 사적 이해관계를 가진 배우자만이 이혼 또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을 뿐, 다른 이들은 이에 대하여 비난을 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법원은 배우자의 부정한 행위에 대하여 이혼을 보장하고 있고, 배우자의 상대방 행위자에게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의무를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재명 당선자의 부인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모르겠지만, 제3자는 이에 관여해서는 안 되고, 그럴 권리도 없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들고 나서서 이미 과거 속 사실로 현재와 미래를 재단하려고 하여서 문제가 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강요로 빚어진 미투와 자유의사에 의해 결정된 성적 자기 결정권은 결코 같은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구의 의사결정에 대해 그게 범죄행위가 되지 않는 한 관여해서는 안 된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는 소설 “닥터 지바고”로 1958년에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되었지만, 러시아 정부의 반대로 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닥터 지바고”는 소설로도 유명하지만 데이비드 린에 의해 영화화된 “닥터 지바고”가 세계적 명화가 됨으로써 더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소설로 쓴 시”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 소설 “닥터 지바고”는 여주인공 라라를 중심으로 닥터 유리 지바고와 혁명가 남편 파샤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크게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관통하는 시대정신을 나타내주고 있다. 어머니의 정부 코마로프스키에게 겁탈을 당한 라라는 뜨거운 여인이자 냉정한 여인으로 소설 속에서 묘사되고 있다. 딸의 겁탈사실을 알게 된 그녀의 어머니 음독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녀를 처음 알게 된 지바고는 나중에 혁명군의 강압으로 종군의사로 부상병들을 치료하다가 간호사로 일하던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어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라라는 볼쉐비키 혁명의 선봉에 섰던 파샤와 결혼했지만, 혁명에 몰두한 남편을 기다리는 삶 속에서 혼인생활은 순탄치 못하다. 물론 닥터 지바고에게는 아내 토냐가 있고, 지바고는 그녀를 깊이 사랑한다. 코마로프스키는 유명 변호사이기도 하지만, 정치중개상으로 유리 지바고가 어렸을 때 부유했던 그의 아버지 사업을 망하게 만든 원수이기도 하다.

이처럼 한 작품 속에서 주인공들의 사랑과 원한이 서로 교차하며 얽히고설킨 애정관계를 펼쳐나가면서도 러시아 혁명이라는 역사를 도도히 펼쳐 보인다. 혁명군이 내몰리자 남편 파샤로 인해 처형당할지도 모르게 된 라라를 살리고자 자신의 아버지를 망하게 한, 그래서 결코 맡기고 싶지 않은, 그녀를 겁탈했던 코마로프스키에게 라라를 다시 맡기는 지바고의 애절함이 소설 말미에 잘 묘사되고 있다. 이 장면을 그리고 있는 영화 속에서는 음악 “사랑의 테마”가 광활한 러시아 설원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흘러나온다. 소설 속에서 라라의 남편 파샤는 적군파의 총에 맞아 죽고, 연인 유리 지바고는 혁명 종결 후 다시 평화로워진 러시아에서 헤어졌던 라라가 길거리를 걸어가는 모습을 전차 안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전차에서 급히 내려 뒤쫓다가 심장마비로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는다. 그 후 라라의 행방도 묘연해지고 만다. 하지만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주인공들이 모두 사라진 시간 안에 라라와 지바고 사이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딸 타냐의 존재를 통해, 지바고가 라라와 헤어지면서 그녀 손에 마지막으로 쥐어 준 자신의 아버지 유품인 러시아 민속악기 발라 라이카를 잘 연주하는 타냐를 통해 라라와 지바고의 사랑이 이어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에서 말한다, “그는 자기 곁에서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인생에서 누군가의 운명이 다른 사람의 운명을 앞지를 때 누가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는가에 대해 생각했다.”라고. 나아가 “이 세계의 모든 움직임은 다 냉정하게 계산된 것이지만, 아울러서 바라보면 그 하나하나의 움직임은 생명이라는 전체적인 흐름에 어우러지고 있었다...... 낙천성이 있어야만 세계는 움직일 수 있다. 낙천성을 가져다주는 것은 다양한 인간들이 서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라며 개인과 전체의 상관관계에 주목한다. 50여 년 전 “닥터 지바고”를 전교생이 함께 단체관람하면서, 이해할 것도 같으면서 이해되지 않은 영화에 깊이 매료되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 후 비디오테이프를 구입하여 수십 번 반복해 보면서 지바고를 이해하고, 라라를 이해하고, 토냐를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운명적 사랑과 헤어짐의 반복 속에서 그리움의 실체를 그려나가는 주인공들의 심리를 따라 가다 보면 영화는 끝나지만, 끝난 영화는 여전히 긴 여운으로 남는다.

미래만을 사는 오지랖 넓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없다. 한 치 앞을 알지 못하는 게 인간인데, 이제 시장이나 도지사로 당선된 이들을 놓고, 4년 뒤의 대통령감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 그들은 역사의 간신이다. 물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오늘만 흥청망청거리며 살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임기를 4년쯤 채운 뒤에 다음 대통령감은 누구일까 하는 것은 모르겠지만, 설익은 풋과일 같은 당선자들을 놓고, 현재 대통령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 임기가 한참 남은 대통령을 두고 무슨 짓거리들인지 도통 알다가 모를 일이다. 지금 후임자 선호도를 언급하는 것은 황색저널의 본색이 나타나는 것이다. 누구든 그렇다. 우리는 좀 차분해야 하고, 현실을 충실히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걷겠다며 성급하게 조급증을 나타낼 필요가 없다. 만일 그런 이들이 있다면 이는 그 오지 않을지도 모를 뒤차에 먼저 타서 세력을 키워 어떻게든 무엇인가를 해봄으로써 사리사욕을 취하겠다는 탐욕을 포장한 것에 불과함을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정상적인 현실 속에서 오늘에 충실하자.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사람들”보다는 “세계를 움직이는 낙천성은 다양한 인간들의 상호 이어짐”에 있다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말을 다시 한 번 깊이 음미해보자. 오늘만이 우리의 운명이다. 오늘은 하지 첫날, 낮이 가장 길다. 태양이 가장 오래 빛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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