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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 & JUSTICE] 엄상익의 변론 문학- 어둠의 자식

기사승인 2018.11.09  13:5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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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소설가, 칼럼니스트

※ 이 글은 법조매거진 <LAW & JUSTICE>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1. 붕어빵장사 엄마

개인법률사무소를 차리고 조그만 나무책상 위에서 30년 세월의 강을 흘러왔다. 육십대 중반을 넘어 이제 칠십 쪽을 향한 나는 이제야 이 직업에 대해 조금 알 것 같다.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싶은 사람이 그냥 살아갈 수 있는 직종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사건만 하려고 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가족이 먹고 살았다. 나이 먹은 지금은 세상에 진 신세를 조금은 갚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보수를 받아서가 아니라 일을 주는 것만 해도 감사할 때가 됐다.
2018년 5월 25일 저녁 퇴근 무렵 육십대 중반의 한 여인이 법률사무실을 찾아왔다. 눈동자에 기운이 없어 보이는 지친 표정이었다.
“아들이 군대 대신 공익근무요원으로 빠져 서울시청에서 근무했는데 출근하지 못해 고발이 되어 지금 동부구치소에 있어요.”
나는 그녀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올 때까지 잠잠히 기다렸다.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저는 어릴 적 청계천 빈민들을 이주시킨 상계동에서 자랐어요.”
그 시절 빈민촌인 상계동의 모습이 시간 저편에서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바라크로 지은 창고 같은 집들이 낮은 처마를 맞대고 포로수용소 같이 들어차 있었다. 몇 백 가구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변소 앞에는 끝도 없이 사람들이 줄을 서 있고 겨울인 땅바닥에는 오줌이 질펀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목수를 하는 삼촌집이 거기 있었다. 그녀가 신세타령같은 자신의 얘기를 계속했다.
“아버지가 막노동을 했는데 나는 일곱 살 때 척추에 결핵균이 침투하는 병을 앓아 몸이 성치 못했어요. 저는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 일 저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스물다섯 살 때 공장에 다니는 사람과 만나 살았어요. 거기서 난 아들이 지금 구치소에 있는 현식이죠. 그 다음해에 딸을 낳았는데 그 남자와 삼년 만에 헤어졌어요. 헤어질 때 그 남자는 아들 현식이를, 저는 딸을 키우기로 했죠. 저같이 부모를 잘못 만나 가난한 팔자는 남편 복도 없어요. 헤어진 남편은 공장기숙사에서 살아야 하니까 아들 현식이를 시골에 사는 형 집에 맡겼어요. 그 형은 농사꾼이라고 하지만 아침부터 술에 절어 사는 알콜 중독자였어요. 자식도 여러 명이었죠. 그 속에 현식이가 끼어서 컸으니 얼마나 눈칫밥이었겠어요? 그렇다고 제가 아들을 데려올 형편도 아니었어요. 배운 것 없고 기술 없는 여자가 딸을 키우며 산다는 게 너무 벅찼죠. 지하철역 앞에서 붕어빵장사를 했어요. 아들 현식이는 부모의 정이라는 건 모르고 혼자 컸어요. 현식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저를 찾아왔어요.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대학진학을 앞두고 부모님을 꼭 모셔오라고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현식이가 다니던 학교를 갔죠. 담임선생님을 만났는데 현식이가 중학교 때부터 축구선수로 뛰었는데 고등학교에서도 주전선수로 활약해 좋은 성적을 냈기 때문에 대학에서 스카웃 대상이 됐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아이의 담임선생이 하는 말이 교감이 칼자루를 쥐고 있으니 교감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라는 거였어요. 결국 돈을 달라는 거였는데 붕어빵을 팔아서 무슨 돈을 만들 수 있겠어요? 돈을 못 냈더니 모든 게 뒤틀어졌어요. 실망한 현식이가 학교를 자퇴했죠. 제가 아이를 달래 다른 고등학교로 전학시키려고 하니까 그 교감선생님이 방해를 해서 그것도 안됐어요. 현식이는 축구선수의 꿈을 접고 이삿짐센터나 술집웨이터로 혼자 살다가 군 소집영장이 나온 거예요. 고등학교에서 자퇴하는 바람에 중졸학력이니까 공익요원으로 됐다고 하더라구요. 그때도 엄마인 저는 아이를 도와줄 형편이 되지 못했어요. 현식이는 가게를 하던 선배한테 얹혀 살았는데 거기서 일해주면서 공익요원으로 나갈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출근을 하면 당장 밥 먹고 잠을 잘 데가 없는 상황이었죠. 엄마인 제가 뒷바라지 할 형편도 못됐지만 현식이도 저를 찾아오지 않았어요. 그때 잡혀서 감옥에 가서 징역을 살았는데 그렇게 하면 모든 게 끝난 걸로 알았어요. 괜찮은 줄 알았는데 같은 사건으로 다시 잡혀 들어갔어요. 공익근무를 안 한만큼 채우지 않으면 또 징역을 산대요.”
“지금은 어떻게 사세요?”
내가 물었다.
“붕어빵장사도 늙으니까 못 하겠더라구요. 그래도 그걸 하면서 힘들게 모은 돈을 종자돈으로 해서 지난해부터 이자를 받아서 살자고 마음먹고 꾸어 줬어요. 그랬더니 한 사람은 부도가 나고 다른 사람은 교통사고가 나서 죽었어요. 그 돈을 다 날려버린 거죠. 없는 놈은 죽어라 죽어라 하는 게 세상인가 봐요.”
그게 우리 사회의 밑바닥층 서민의 내밀한 삶의 모습이었다.
법원에서 사건기록복사를 신청해 읽고 나면 다음 수순으로 동부구치소를 찾아가 그를 만나는 게 나의 일이다.

2. 웨이터 아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2018년 5월 17일, 나는 동부구치소를 찾아가 김현식과 만났다. 쌍꺼풀 진 부리부리한 튀어난 눈이었다. 눈빛에는 삶의 피곤에서 생긴 독기가 약간 묻어 있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된 거니?”
피고인의 전반적인 사정을 알기 위해 에둘러 물었다.
“포장마차를 하기도 하고 주점 웨이터노릇을 하면서 혼자 살았어요. 그러다가 공익판정을 받았는데 가지 못했어요.”
“왜 가지 못했지?”
“그냥 그랬어요”
그게 대답의 전부였다. ‘그냥 그랬다’는 말의 행간에는 절실한 사연이 존재할 텐데 그게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감옥에 들어간 사람들의 상당수는 말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말을 하려고 해도 검사나 판사는 듣지 않았다. 40년 저편의 세월 속에서 군사법원 법대 위에 판사로 앉아있던 이십대 시절 나의 모습이 안개같이 피어올랐다.
당시 나는 한 달에 300여 건에 가깝게 군무이탈사건을 처리했다. 지금의 공익요원이 당시는 방위병이라고 해서 시청이나 동사무소에 출퇴근하면서 행정업무를 보조했다. 인간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던 나는 양형기준에 따라 기계적으로 판결을 선고하면서 아무런 가책도, 생각도 없었다. 복무를 이탈한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체포되었는지, 자수했는지, 재판매뉴얼에 있는 기준에 따라 일을 처리했었다. 법대 아래 주눅 든 피고인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환청같이 들려온다.
“근무지까지 올 버스비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었다.
“할머니를 모시고 둘이 사는데 할머니가 갑자기 아파서 출근할 수가 없었어요.”
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던가? 핑계고 거짓말로 들렸었다.
“사랑하던 여자가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술에 취한 채 절망해서 방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아픈 가슴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믿음 때문에 병역을 거부하고 형을 살았는데 왜 또 다시 재판을 받는 겁니까?”
총을 들기를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의 항변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한 신성한 국방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공허한 관념과 형식논리로 판결을 선고했다. 나는 법대 밑에서 재판을 받는 사람들이 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그들의 내면을 보려고 하지 않고 기록만 수학문제 풀듯이 볼 뿐이었다. 인간을 판단하는데 관념과 논리는 정신적 전족의 도구였다. 그 틀로는 복잡한 인간을 재단하기 불가능하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앞에 있는 그에게 물었다. 이제는 인간적인 변론자료를 끌어내야 했다.
“어떻게 자랐니?”
“그냥 그렇게 살았어요.”
또 같은 식으로 말했다. 그건 대답이 아니었다.
“그렇게 추상적으로 말하지 말고 한번 자랑할 게 있으면 말해 봐라.”
그를 달래면서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다. 자랑을 하라고 하니까 얼굴표정이 달라졌다. 그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초등학교 다니던 열 살 때부터 축구선수로 뽑혔어요. 서울시대회에서 두 번 우승했어요. 중학교에 가서도 축구선수로 수비인 스위퍼를 맡았는데 전국대회에서 우승했어요. 고등학교 때도 축구를 했는데 전국대회에서 3위를 하고 대학도 특기자로 들어갈 자격이 됐었어요. 대학교에 스카웃 될 수 있다고 코치가 말했어요.”
“야 대단하다. 어려서부터 축구를 잘하는구나.”
추임새를 넣어주면서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그러자 처음으로 그의 얼굴이 환하게 변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우수한 선수가 되려고 어떻게 노력했니?”
그를 위로하기 위해 다시 물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그랬던가.
“축구선수기 때문에 학교운동부 기숙사에서 먹고 잘 수 있었어요. 죽어라고 연습했어요. 새벽에 운동장에 나가서 두 시간 달리고 학교수업하고 점심시간에 다시 나가서 네 시간 연습을 하고 밤 아홉시 넘어서도 잘 때까지 달렸어요. 그렇게 해서 금메달을 따고 엄마한테 알렸죠. 학교에서 엄마를 데리고 오라고 해서 아빠와 이혼하고 헤어져 살던 엄마를 찾아가 학교에 같이 가자고 했어요. 엄마가 다녀간 후에 학교 선생님이 하는 말이 너희 엄마가 제대로 뒷바라지를 안 해서 대학에 스카웃 되기는 틀렸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화가 나서 자퇴를 했어요. 그리고 포장마차, 서빙 등 이일 저일 닥치는 대로 하면서 먹고 살았죠.”
“포장마차도 하고 웨이터도 했으면 시비도 걸리고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이 있었을 텐데 전과는 없니?”
“합의금이 없기 때문에 억울한 일이 있어도 항상 참고 얻어맞았어요. 얻어맞고 경찰서에 끌려갔는데 같이 싸웠다면서 검사가 양쪽에 벌금을 내라고 해서 벌금형을 받은 적은 있어요.”
운동선수 출신의 그는 솔직하고 담백한 모습이었다. 이삿짐센터에서 노동을 하고 밤이면 주점에서 서빙을 했다면 낮에 시청에 나가 공익요원으로 근무한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공익요원으로 근무를 하려면 일을 하지 말아야 하고 그렇게 하면 당장 밥 먹고 잠잘 곳이 없는 신세가 분명했다. 피의자 신문조서에는 ‘일자리 때문에’라고 간단하게 근무하지 못한 사유가 기록되어 있었다. 갑자기 그의 표정에 의문의 빛이 떠오르면서 그가 나에게 물었다.
“전에 똑같은 죄로 징역을 살았는데 다시 똑같은 죄로 이번에 또 구속이 됐어요. 법이 왜 그런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처벌을 한번 받으면 그 다음에는 괜찮은 걸로 알고 있었어요.”
우리의 군대복무규정은 깐깐하다. 징역을 살아도 복무하지 않은 남은 기간만큼 다 채워야 했다. 공소시효가 지나갈까봐 일정기간마다 그걸 중단시키는 조치가 있었다. 바람같이 다니는 그는 출소 후 재복무 통지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왜 다시 재복무를 하지 않았어?”
다시 물었다.
“경찰서 아는 형사한테 물어봤더니 이미 형사처벌도 받았고 또 병역법위반이라고 하더라도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괜찮다고 했어요. 변호사한테 물어봐도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어요.”
공소시효가 중단된 게 틀림없었다. 없는 집 아들들은 법에서도 그렇게 서러운 경우가 많았다.

3. ‘약간만’ 재판장

그는 10년 전인 복무 이탈죄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서 복역을 하고 나왔다. 그는 더 이상 복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알았다. 배우지 못하고 기술 없는 그가 할 건 이삿짐센터 노동자, 포장마차, 주점 웨이터밖에 없었다.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았다. 아버지가 버리고 엄마가 버리고 학교에서 그를 버렸다. 어느새 마흔 살이 가까웠다. 떠돌이였던 그에게 일 년 전 공익요원으로 재복무하라는 취지의 통지서가 나왔다.
부모도 학교도 그를 버리는데 병무청은 그를 잊지 않고 끌어가려고 했다. 대법원 판례들을 찾아봤다. 정신지체의 경우나 우울증, 갑작스런 식중독의 경우로 근무하지 못한 경우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해서 예외적으로 처벌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먹고 잘 데가 없어서 못나간 그는 용서받을 것 같지 않았다. 십년 전에 받은 형 같이 그는 또 일 년의 징역형을 받을 게 거의 틀림없었다. 법의 사각지대 속에서 그는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때 나는 뭐라고 변론을 해야 하나.
사법경찰관의 조서나 검사의 공소장에는 8일간 복무를 이탈했다는 메마른 문장 한 줄과 법조문만 적혀 있었다. 세상과 사이에 벽을 쌓고 그늘 안에 박혀있던 그는 마음을 말로 털어놓지 않았다. 말했어도 그의 말이 들어가 박힐 자리는 조서 안에 없었다. 나는 인생 마지막 장을 진짜 힘든 사람을 위해 변론을 해보자는 작은 소망을 품었다. 하나님이 내게 보낸 사건을 순수한 마음으로 해보자는 것이다.
오랜 변호사생활에 변론의 의미도 많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법적 쟁점사실을 핀셋으로 집어내듯이 정확히 끄집어내어 명쾌하게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변론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달라졌다. 하얀 종이 같은 인생에서 얼룩진 점이 죄였다. 검사의 공소장은 그 검은 점을 건조한 문장 하나로 정확히 짚고 있었다. 변호사는 얼룩이 아닌 하얀 여백인 인간을 묘사해야 했다. 가장 자연스럽게 그의 모습을 나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허한 관념의 나열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붕어빵장사를 하는 엄마의 넋두리를 변론서에 써내려갔다. 비가 오던 날 어두침침한 구치소 구석에서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변론서 안에 묘사했다. 뻐꾸기 둥지 속에 넣어진 제비처럼 남의 집 아이들 속에 던져졌던 어린 날 그의 아픈 마음을 적고 싶은데 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걸 공감할 수 없었다. 살면서 얻어맞고 발에 채였던 쓰라렸던 그의 삶을 적어주고 싶은데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핏발이 서린 물기 젖은 그의 눈이 그의 감정표현의 전부였다. 나는 기어코 그의 가슴속에 꽁꽁 뭉쳐있는 응어리를 풀 수 없었다.

재판을 하는 날이다. 하늘에는 얇은 구름이 가득 끼어 빈틈이 없었다. 그래도 비는 내릴 것 같지 않았다. 오전 10시경 서초역에서 2호선을 타고 사당에서 4호선으로 갈아탔다. 창동역에서 내려 도봉산 쪽으로 가는 1호선으로 다시 갈아탔다. 지하철역은 후줄근한 등산복 차림의 내 또래의 영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출근시간이 끝난 시간대에 강가의 밀려난 조약돌 같은 남자노인들은 전부 산으로 쫓겨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곳 바위에서 묵묵히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내려와 집으로 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보면서 밀물같이 측은한 마음이 스며들어왔다. 동시에 나는 아직 일이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돈을 받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제는 힘이 들어도 일이 있다는 그 자체가 행복이다.
법정의 방청석에는 판결 선고를 들으러 온 방청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십대 초쯤 되는 여성 재판장이 피고인들을 차례로 불러 앞에 세우고 형을 선고하고 판결문을 읽고 있다. 초등학교 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국어책을 읽듯이 여성 재판장은 감정 없는 목소리로 판결문을 줄줄이 읽어 나가고 있었다. 짧게 자른 머리가 이마를 수북하게 가리고 있다. 불룩한 볼 위로 작은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남자 같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 앞에 나서서 선고를 받는 피고인 중에는 예쁜 얼굴을 한 여자가 간간이 눈에 띄었다. 잘생긴 여자들이 무슨 죄를 지어서 여성재판장 앞에서 선고를 받을까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피고인은 죄질이 나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피고인에게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을 하기로 했습니다.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한다. 돌아가세요.”
그 말을 앞에서 듣는 여자가 순간 당황한 표정이 서렸다. 같은 여성끼리 봐줄 걸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방청석 쪽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때 검은 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은 여성 경비원이 다가가 법대 옆에 나 있는 작은 문 쪽을 향해 데리고 가고 있었다. 선고를 받는 사람들에게 그 문은 감옥으로 가는 지옥문이었다. 또 다른 여자가 재판장 앞에 섰다.
“피고인은 아파트 주민으로 관리사무소 직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찾아가서 욕을 하고 머리끄댕이를 끌었군요. 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법은 그런 행패를 부리는 걸 그냥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피고인을 법정구속하기로 했습니다. 피고인을 징역 4월에 처한다. 불복이 있는 경우 일주일 이내 항소하기 바랍니다.”
그 여자도 재판장 옆 벽에 나있는 지옥문으로 향하고 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로 찾아가 신나게 갑질을 한 대가인 것 같았다. 한 시간정도 기다리면서 여성 재판장의 선고를 듣다보니 독특한 말버릇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의 입에서는 “약간만”이라는 소리가 자주 나왔다. 형을 깎아 줄 때는 약간만 깎아 준다고 했다. 법대에 앉아있는 세 명의 판사들을 보면서 요즈음 텔레비전에서 방영하고 있는 법원드라마의 광경들이 떠올랐다. 법대에서는 근엄하게 앉아 있지만 판사실로 돌아가면 철제 캐비넷에 기록이 가득 차 있고 책상 위까지 넘쳐나는 속에서 골무를 끼고 기록을 뒤적이고 판결문을 쓰는 지식노동자였다. 그런 속에서 다른 판사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경주마 같이 트랙을 달리는 존재들이었다. 퇴근시간이면 양쪽 귀에 이어폰을 끼고 외국어 공부를 하면서 만원지하철에서 보통사람들과 똑같이 아파트로 돌아가는 법원공무원이기도 했다. 검은 법복을 입고 법대위에 올라가는 순간 그들은 또 다른 무표정한 탈을 써야 했다. 감정을 나타내면 사람들이 그걸 읽고 점을 치기 때문에 마네킹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 변 론

“나오시죠”
여성 재판장이 내가 맡은 사건과 피고인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했다.
“복무이탈을 해서 전에 징역형을 살고 만기출소 했군요.”
재판장이 그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재복무명령이 나갔는데도 계속 근무하지 않았군요.”
“통지서를 못 받았어요.”
“그걸 받았으면 가서 근무를 했었을 것 같아요?”
“......”
그는 침묵했다.
“지금 몇 살이죠?”
“곧 마흔 살이 됩니다.”
“지난해에도 근무하라는 통지를 받고도 시청에 가서 일을 하지 않았죠?”
“나이를 먹으면 안가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의 대답이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통지를 받고도 근무를 하지 않았죠?”
“먹고 잘 데가 있으면 근무하러 갔을 거예요. 그런데 그게 없어서 못 갔어요. 일해주면서 술집골방에서 잤는데 낮에 근무하러 가면 술집 주인이 싫어해서요.”
“증인으로 부를 사람 있어요?”
“없습니다.”
“정상참작을 위해 낼 자료는 없나요?”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증거조사와 심리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검사 의견진술 해주시죠.”
여성검사가 기록 속의 공판카드를 보면서 “징역 1년”이라고 짧게 암호같이 말했다.
“변론하시죠.”
재판장이 나를 보면서 말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한 행위에 비해 법은 피고인에게 참 냉랭한 것 같습니다. 소설 ‘삼포 가는 길’의 주인공같이 피고인은 정처가 없었습니다. 이삿짐센터 노동자로, 술집 웨이터로, 포장마차를 하면서 떠돌았습니다. 잠 잘 곳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일정한 주거는 사치였습니다. 법은 그런 그를 따라가면서 붉은 딱지를 붙였습니다. 판사는 그가 전출입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병역법 위반으로 벌금을 백만 원을 부과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노동을 하는 피고인에게는 큰돈이었습니다. 아마도 판사는 피고인의 사정을 모른 채 기록만 보고 기계적으로 벌금형이 적힌 약식 명령서에 도장을 찍었을 것입니다. 십년 전 피고인에게 징역형을 선고한 판사는 벌금을 받은 전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무단결근했다고 판결문에서 질타하고 있습니다. 판사들은 피고인이 수사를 받을 때마다 기소중지 됐다고 지적하면서 재복무에 대한 의지가 없고 무단결근에 대한 책임도 회피하는 모습이라고 단정하면서 정상참작을 할 여지가 없다고 결정했습니다.”
판사들은 아마도 한 번도 그를 인간으로서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책상 위나 캐비넷 구석에 쳐 박혀 있는 하나의 기록에 불과했을 것이다. 형사들은 정처 없이 떠돈 그에게 연락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기소중지처분이 된 게 틀림없었다. 그가 보통의 부모만 가졌어도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걸 보지 않은 판사는 그를 질타만 하고 있었다. 내가 변론을 계속했다.
“중고등학교시절 피고인의 생존방법은 축구선수가 되어 기숙사에서 잠을 자고 밥을 얻어먹는 일이었습니다. 피땀 흘린 노력으로 그는 대학의 스카웃 대상이 되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인지는 몰라도 돈을 바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측근인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건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수억 원이 되는 말만 있으면 특기생으로 명문대학에 들어간 특권층의 딸과 비교되는 인생일 것입니다.
변호인은 피고인의 행위에 대해 뭐라고 변론을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가난과 불우한 성장과정을 신파조 같이 말하면서 봐달라고 사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먹고 사느라고 근무할 수가 없어서 나가지 못한 겁니다. 병사로 군대에 갔더라면 그곳에서 먹고 잘 수가 있으니까 이런 죄인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잠시 말을 끊고 순간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의 내면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근본적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기 때부터 부모에게서 버려진 아픔을 알 수 없었다. 집밥을 먹지 못하고 기숙사에 얹혀살아야 하는 처량한 상황을 공감할 수 없었다. 죽을힘을 다해 하루종일 운동장을 뛰고 또 뛰었지만 막상 선수가 될 수 있는 순간 학교에서 내동댕이쳐진 절망을 나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의 고통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면서 하는 변론은 공허한 관념의 나열인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은 인생의 밑바닥에서 고난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해 부담을 느낀다. 듣기 싫어하는 것이다. 판사들도 어느 면으로는 마찬가지였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미인의 실연에 대해서는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웃의 진짜 아픔에는 냉담했다. 내가 변론을 계속했다.
“많은 시간이 흘러 이제 피고인도 나이 사십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얼마 전 검사장 출신의 모 변호사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모 재벌회장이 일으킨 파렴치한 사고를 입건유예를 시켜주고 거액의 수고료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법의 그늘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입니다. 반면에 피고인 같은 가난한 젊은이가 살기가 힘들어 며칠 출근을 못한 걸로 징역을 살고 또 반복해서 징역형이 선고되는 세상입니다. 법의 이면에서 이런 상반된 현상이 있는 걸 재판장께서 아시는지 궁금합니다. 재판 전에 한 시간 동안 재판장님의 판결 선고 장면을 보았습니다. 약간만 봐주기로 했다고 하면서 형을 감경해 주셨습니다. 인정이 많으신 분 같았습니다. 재판장께서 단 한 달이라도 피고인의 징역형을 감경해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한 시간 동안 재판장의 선고장면을 목격했다는 소리에 여성 재판장의 작은 눈이 동그랗게 뜨고 토끼같이 놀란 표정이었다.

5. 그것도 배역인가?

도봉역 승강장엔 옅은 저녁 어스름이 기척도 없이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역사 벽 아래 놓여있는 긴 의자에 앉아 플랫폼 밖의 두 줄로 난 선로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다. 컴컴한 환경에서 태어나 어둡게 살다가 깜깜한 절벽 같은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을 참 많이 보아왔다. 빈민촌에서 태어나 공부하지 않고 건달노릇을 하다가 감옥을 드나들고 마지막에는 갈 곳이 없이 길거리로 내팽개쳐지는 인생들이 땅 밑의 하수구에 흐르는 검은 물같이 세상의 이면에서 흐르고 있었다. 변호사는 맨홀뚜껑을 열고 그런 흐름을 보는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작은 횃불이라도 비쳐주고 싶을 때가 있었다.
20년 전 대도라고 불리던 도둑을 변호한 적이 있었다. 6.25 전쟁고아였던 그는 깡통을 들고 밥을 얻어먹으러 다니는 거지였다. 그가 자라면서 도둑이 되었다. 남다른 본능적 감각과 힘을 지닌 그는 어떤 집도 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법망은 느슨하고 연자방아 같이 천천히 돌지만 결국은 철저히 인간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다. 추위가 가시지 않은 봄날 냉기 가득한 구치소의 접견실에서 그를 만났었다. 이런저런 그의 얘기를 듣고 한 후에 물었다.
“삶의 의미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둠에서 나서 어둠으로 가는 그의 인생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저 같은 놈은 평생 감옥에서 살 팔자죠. 밖에 잠시 나가 있을 때면 오히려 불편해요. 이 안이 고향같이 편해요. 하나님이 나 같은 놈을 왜 세상에 보내셨냐? 평생 저렇게 감옥에서만 사는 비참한 놈이 있다는 걸 세상에 알리는 샘플이죠. 지옥에서 기름가마에 튀겨지는 처참한 인간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경각심을 일으키듯 말이죠. 그렇게 말이죠.”
정말 하나님은 인생의 무대에 갖가지 형태의 인생을 의도적으로 만드셨을까? 어렸을 때부터 사회에서 내동댕이쳐진 자의 강한 심리적 저항은 아닐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그가 만든 동산에는 사자와 코끼리도 있다. 그런데 바퀴벌레와 두더지도 만드셨다. 아무리 빛을 비추어도 바퀴벌레와 두더지는 빛으로 가지 않았다. 같은 감옥의 철창을 통해서도 죄수들은 보는 게 다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밤하늘에 하얗게 떠 있는 달을 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바닥에 고인 진창물을 내려다본다. 어떤 걸 보느냐에 따라 어둠 속에서도 빛의 길로 나가는 사람도 있고 그걸 싫어하는 바퀴벌레 같은 인생도 있었다. 몸이 어디에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 영혼이 빛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았다. 며칠 후 그에게 약간의 영치금과 작은 성경책 한권을 보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머지는 내가 모르는 그분의 뜻이다. 한 달 후 그에게서 편지가 왔다. 평소에 과묵한 그의 성격같이 내용도 간단했다.
“보내주신 거 받았어요. 정말 감사해요. 잘 볼게요.”
그의 마음 중심에 있던 차고 단단한 어떤 것이 조금씩 녹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3주 후에 선고가 있었다. 재판장은 징역 1년을 다시 선고하면서 이렇게 이유를 말했다.
“사정이 딱한 건 알겠지만 다른 피고인들과의 형평상 봐주기가 곤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죄만 법의 저울에 달지 말고 마음이나 환경도 측량해 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엄상익 desk@lec.co.kr

<저작권자 © 법률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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