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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편견’으로부터의 자유

기사승인 2019.01.11  15:2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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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한국지정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베리타스법학원전임

얼마 전. 저녁 10시가 넘은 시각. 야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갑자기 장모님께 걸려온 전화.

그 전화는 장모님 친구 남편분의 부고 소식을 늦게나마 알리는 전화였다.

저녁 10시가 넘어 장례식장을 가야 하는 상황이 나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장례식장은 교통편이 나쁘기로 유명한 곳. 늦은 연락 탓에 다음 날 아침이 발인인 상황이었다. 술을 마셔 차로 모셔다 드릴 수는 없고. 와이프는 술도 같이 했지만 아침에 일찍 출근해야 하는 상황. 어찌 해야 할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사위까지 따라갈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택시를 타시는 데까지 모셔다 드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첫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빠 할머니랑 안가?” 첫째 딸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어. 할머니만 가시려고 하는데” 그러자 첫째 이야기. “아빠도 같이 갔다가 와. 이 밤에 할머니만 혼자 가면 무서워.” 첫째 아이 눈 속엔 안타까움이 한 가득. “그러면 안 돼.” 그리고 그 눈 속에서 또 보았다. “에이 아빠 왜 그래? 원래 안 그러잖아.”

나는 머리를 한 대 쿵 하고 맞은 기분이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아이가 맞고 내가 틀렸다. 이리 저리 안갈 수 있는 핑계를 찾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짧은 시간 내에 나는 차를 운전할 수 없다는 것에서부터 한국 사회에서 사위 역할에 대한 기대까지 스펙트럼을 넓혀가면서 핑계를 찾았던 것이다. 최종 논리. 일반적인 상황에서 장모님을 장례식장에 모시고 안 간다고 욕을 먹지는 않을 거야. 특히 한국에서는.

그런 나에게 딸의 눈동자는 이야기했다. “그건 다 핑계야” 그리고는 “이 밤에 할머니 혼자 장례식장을 가면 얼마나 겁나겠어.”라며 크게 꾸짖었다.

그렇다. 나는 사회적 ‘편견’에서 안갈 핑계를 찾았고 아이는 ‘본능’에서 가야할 이유를 찾았다. 어느 누가 그 밤에 장례식장을 혼자 가고 싶을까!

그날 딸의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다. 그 안에는 할머니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빠에 대한 실망이 담겨있었다. 이일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눈빛 교육.’ 얼마쯤 시간이 지난 뒤 그날을 복기해보았다. 나의 편견에 대해.

나의 판단이 얼마나 편견으로 가득 찼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만약에 전화를 받은 사람이 장모님이 아니라 내 어머니였다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따져보면 된다. 그때도 “굳이 내가 갈 필요까지 있을까”라면서 방어논리를 찾았을까. 다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볼지를 먼저 따졌을까 아니면 내 엄마가 혼자 가기 불편하지 않을지를 따졌을까. 아마 그 상황이었다면 다르게 행동했거나 같은 행동을 했다고 해도 다른 논리가 있었을 것이다. 왜? 그때는 행동해야 하는 방식이 다르니까.

그런데 이것도 편견이다. 생각해보라. 늦은 밤 교통편이 나쁘고, 조문객도 다 떠났을 시간의 장례식장을 혼자 가야할 때 내 엄마와 와이프의 엄마가 느끼는 마음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내가 행동할 행동방식이 다르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두 조건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존재하지 않음에도 기대되는 사회적인 행동이 다르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사회적 편견 때문이다. 이때 사회적 편견은 문화와 관습의 다른 이름이다. 사회화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만든 편견들.

그렇다. 나는 편견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생각이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 고정된 사고, 선입견을 다른 편견들을 동원해서 정당화해왔고 정당화하고 있다. 편견덩어리 같으니라고.

그때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과연 난 이런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만약 인간의 조건 때문에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면 자유롭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을까? 철학적인 이 질문은 편견에 대해 좀 더 생각할 이유를 만든다.

우리가 일상에서 거의 모든 영역에 이르기까지 편견에 영향을 받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매일 쌀의 지배를 받고. 같은 노선의 버스를 타고. 같은 칸에서 지하철에 오르고. 더 나가 일정 나이가 되면 어느 역할을 기대하고. 그 외에도 학교, 직장, 결혼, 주택, 자동차 기타 등등.

편견은 말 그대로 어떤 논리적 근거를 가지기 전에 판단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저 개인적인 것이라면 선입견으로 비춰지고 말 수도 있다. 그런데 사회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질 경우는 좀 더 복잡하다. 역사, 관행, 관습, 문화, 매너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이전에 작동하는 것으로 편견의 다른 양태이기 때문이다.

편견이 오랜 시간에 걸쳐 보편적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산물이라고 하면 한 가지 어려운 질문이 생긴다. “편견은 나쁜가?”이다. 전적으로 나쁜 것이라면 이리 오랫동안 만들어지고 유지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국의 보수주의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는 사회적 관행과 관습을 ‘편견(prejudice)’이라고 이름 붙이고 편견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는 이성이 아니라 ‘편견’이 인류를 발전시킨다고 보았다. 더나가 편견은 스스로 판단하기 전에 받아들여야 하는 도덕적 기준이자, 실존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는 목적(telos)이 있고 이를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도덕적인 편견(사회의 기준)은 불가피한 것이자 인간 존재의 본질이다. 또한 홉스와 데카르트와 하이데거처럼 인간본성과 실존을 밝혀낸 수많은 철학자들의 노력 역시 편견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들이다.

반면에 ‘이성’을 강조하는 합리주의자들에게 사회적 ‘편견’은 떨쳐내야 하는 족쇄이다. 그들은 이성이 우리를 사회적 편견에서 구원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예를 들어 에드먼드 버크와 철학적으로 싸웠던 토마스 페인에게 편견은 ‘상식’을 저버리는 장애물이다. 또한 칸트에게 사회적 관습, 본성과 같은 편견은 이성의 명령을 거부하게 함으로서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없게 만드는 ‘타율’의 전형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보자. 좋고 나쁨을 떠나 인간의 본성 자체가 편견이라고 치자. 또한 사회가 하나의 도덕적 편견으로 구성되었다고 하자. 편견이 본성과 사회자체라는 존재구속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편견과 동떨어져 살 수는 없다. 그렇다고 좋은 편견을 찾고 나쁜 편견을 거부한다는 모범답안도 그리 가능해보이지는 않는다. 좋고 나쁨 자체가 이미 편견이기 때문에.

그럼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욕심을 버리고 편견자체를 마주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편견으로부터의 자유. 그런데 이 결론에는 자기모순이 있다. 편견을 깨보자는 ‘규범’이 가정(이 또한 편견임)으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나?’는 다른 질문으로 대체된다. ‘무엇을 꼭 해야만 하는가?’ 편견이 존재한다고 이것에 꼭 규범적 판단과 처방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 또한 편견이다. 오지랖이라는 다른 이름의.

이렇게 되니 이상한 결론이 난다. 딸아이의 눈빛은 나를 편견으로 초대했다. 나는 편견과 자유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편견에서의 자유는 규범과 처방을 포기하게 한다. 그저 내가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 이 주제에 대해 글을 쓰면서 다시 편견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저 자신이 편견을 가지고 있음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편견의 ‘문제점’에서 시작했으나 편견이 ‘존재함’에서 끝을 내야 한다. 그렇게 편견은 내게 아이러니를 던져주었다. 아 어렵다...

CF. 지난 칼럼들을 좀 더 보기 편하게 보기 위해 네이버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주소는 blog.naver.com/heesup1990입니다. 블로그 이름은 “일상이 정치”입니다.

신희섭 desk@le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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