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황교안의 죽은 말, 김진태의 산 말, 모두가 감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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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황교안의 죽은 말, 김진태의 산 말, 모두가 감옥이다
  • 오시영
  • 승인 2019.02.22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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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갇힌 자는 감옥 안에서 자유롭다. 감옥의 자유는 감옥의 크기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아주 좁은 공간일망정 감옥 안의 자유를 누리는 갇힌 자의 자유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갇힌 자가 감옥 밖 자유를 간구하는 순간 감옥은 자유가 아니라 부자유의 바늘찌름이 된다. 머리 정수리를 찌르고, 발바닥을 찌르고, 심장을 찌른다. 그런데 갇힌 자가 영원히 감옥 안에 머물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일반적 상황이기에 그가 누리는 자유는 결국 파국을 맞게 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우리 생의 한 감옥에 갇혀 사는 수인일지도 모른다. 그 감옥의 크기가 다를 뿐, 어떤 이는 넓은 감옥에서, 어떤 이는 좁은 감옥에서 개미 쳇바퀴 돌 듯 감옥의 가장자리를 맴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탈출을 꿈꾸며 사는 것이다.

말은 화자의 감옥이다. 침묵은 화자의 내적 감옥에 머물지만 쏟아내 놓은 언어는 화자의 감옥이 되어 감옥 밖 세상에서 감시되고 평가된다. 말의 생명력은 끈질겨서 허공에 사라지는 것 같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고, 지구를 몇 바퀴 돌아서라도 제 자리로 돌아온다. 마치 거울 앞에 마주 서듯 화자의 정면에 서서 화자를 향해 빙긋거리며 웃는다. 손을 휘저어 사라지게 해도 붙잡히지도 않으면서 사라지지도 않는 묘한 생명력으로 화자를 기쁘게 하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한다.

자유한국당 전당대회가 이제 며칠 후로 다가왔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개최되는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는 그날, 하필이면 그날 전당대회를 치러야 하는 자유한국당으로서는 힘겨운 자기존재부각전쟁을 치러야 할 판이다. 자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전당대회에서 당대표와 최고위원으로 출마하는 후보자들의 말이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급기야는 역사적 사실로 규명된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을 우파로서 좌시해서는 안 된다거나,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잘못되었다거나, 문재인 대통령을 “저딴 게”라거나 폭언에 망언이 거듭되고 있다. 당장은 당원들로부터 표를 얻기 위해 교언영색을 늘어놓는 것처럼 치부할 수도 있지만, 언어는 그 사람 자체라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화자의 인격과 지성, 진심과 교양이 그대로 표출되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이다. 언어가 무너지면, 그 사람이 무너진다.

황교안 전 총리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침묵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이다. 시인인 필자의 눈에 비치는 그의 언어에는 생명력이 없다. 죽은 언어를 사용하는 자는 뜨거운 가슴이 없고, 공감능력이 없고, 희생의지가 없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죽은 언어는 또 묘한 면이 있으니, 책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뜨겁지 않으니 데일리 없고, 공감능력이 없으니 홀로 자신의 감옥에 갇혀 남을 괴롭히지 않아 적을 만들지 않고, 희생 의지가 없으니 남과 부딪힐 일이 없다, 혼자 고고하고, 혼자 깨끗하며, 혼자 유유자적할 뿐이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상태, 그게 바로 죽은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최대 장점이다. 하지만 세상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죽은 언어의 화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전당대회 토론회에서 황교안 후보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결과에 대해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잘못 되었다라고 답변하였다. 어찌 보면 그가 내뱉은 말 중에서 가장 생명력 있는 말이었지 않을까 평가된다. 그러나 곧 이은 기자들의 질문에 세모라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동그라미도, 가위표도 아닌 세모라는 것이다. 다시 그의 순간 생명력 있는 언어가 길을 잃고 죽은 언어로 변하는 순간을 지켜보며, 역시 음흉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걸 어찌할 수 없다. 죽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며 당신에게 나는 적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적이 아닌 자는 누구에게도 친구도 아니다. 생명력 있는, 살아 있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니 아무도 데이지 않기에, 같은 상처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자신의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김진태 후보가 어쩌면 살아 있는 언어를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살아 있는 언어, 생명력 있는 언어가 반드시 사람을 살리는 언어라는 의미는 아니다. 살아 있는 언어에는 사람을 살리는 언어도 있고, 죽이는 언어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무한한 자유의 세계로 인도하는 언어도 있고, 골방 깊은 지하감옥으로 인도하는 언어도 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언어는 색깔이 있고, 열기가 있고, 날카로움이 있어, 언어로서의 역할, 살리고자 하는 목적이든, 죽이고자 하는 목적이든,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장점이 있다.

자유한국당 전당대회를 앞둔 토론회 등에서 펼쳐지는 후보자들의 무차별적인 언어를 보면서 “사람들이 미쳐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절제력을 상실한 언어가 허공을 휘젓고 다니며 사람을 집단 최면의 흥분상태로 몰아가는 듯한 현상을 보며 히틀러 시대의 괴벨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태극기를 앞세운 일부 극우세력의 집단 함성에 매몰되어 건전한 보수의 싹이 매말라 가고 있다. 어쩌면 전당대회의 후유증으로 이념의 차이(실재는 다음 총선에서의 공천권 문제로 인한 불이익 회피)로 인한 중도보수 성향의 당원들이 뛰쳐나오는 분당사태가 발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명확한 것은 모두 자신의 삶을 감옥에 가둘 가시 언어를 지나치게 남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은 표를 얻어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길인지 낭떠러지인지 모르고 내달리고 있지만, 돌아보면 남은 건 자신이 자신의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자각뿐일 것이라는 점을,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바로 그 사람 자신이라는 점을 깊이 인식했으면 한다.

문효치 시인의 시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를 본다. 이안삼 선생이 작곡하여 널리 애창하는 가곡이 되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다. 사랑의 절묘함을, 언어의 품격을 참으로 잘 드러낸 시라 할 수 있다. 필자도 자주 애창하고 있는 시이자 가곡의 노랫말이기도 하다.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허공에 태어나/ 수많은 촉수를 뻗어 휘젓는/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될/ 온 몸을 태워서/ 찬란한 한 점의 섬광이 될/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빛깔이 없어서 보이지 않고/ 모형이 없어서 만져지지 않아/ 서럽게 떠도는 사랑이여// 무엇으로든 태어나기 위하여 / 선명한 모형을 빚어/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되어라.” (전문, 노랫말로는 반복되여 표현된 부분이 추가되어 있다).

언어는 이처럼 아름다운 것이다. 사랑이라는 그 신비한 - 빛깔도 없고, 모형도 없는 – 존재를 이렇게 절묘하게 표현할 수가 없다. 사랑은 부존재한 “무한한 무(無)”이면서 존재하는 “무한한 유(有)”이다. 어디에서 태어나는지도 모르고, 어디에서 스러지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뜨거운지도 모르고, 얼마나 차가운지도 모른다. 그 아무도 모르는 사랑이 “허공에서 태어나” 버리는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 수많은 촉수가 생겨나고, 이렇게 생겨난 촉수는 또 어딘가 닿을 때까지 허공을 휘젓고 다니는 것이다. 자기가 태어난 허공을 휘젓고 다니며 허공을 구체적 실존으로 만드는 힘, 그게 바로 사랑이다. 대상에 닿는 순간 스스로 불이 되어 온 몸을 태우고 궁극에는 한 점의 섬광이 되어 버리는 사랑의 신비를 너무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문효치 시인을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빛깔이 없고, 모형도 없는 사랑이기에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예전의 그 선명하고 아름다웠던 그 사랑을 다시 되찾기 위해 다시 한 번 허공을 휘저으며 “무엇으로든 태어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인간 내면을 이렇게 잘 표현할 수가 없다.

언어는 품격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치판이 그렇지만, 유독 이번 자유한국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펼쳐지는 언어는 저주와 폭언, 시정잡배들도 쉽게 사용하지 않을 저급하고 무례한 언어들이 난무하고 있다. 듣는 이들의 속을 상하게 만들고 있다. 어떤 이들은 정나미가 떨어진다고 등을 돌릴 것이고, 어떤 이들은 더 이상 기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며 뒤돌아설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부 극소수이겠지만, 그러한 광신적 폭언을 갈급하게 기다렸던 이들에게는 갈증 속 단물이 될 것이어서, 그들을 불러 모으는 데 성공할지도 모른다. 그 작은 성공을 꿈꾸며 의도적 망언을 퍼붓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전당대회가 끝나고 나면, 말 그대로 “잔치가 끝났다.”라며 허망해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쪽에서 저주와 망언이 난무하는 같은 시간에 하노이에서는 제2차북미정상회담이 열리고, “끝난 잔치의 허망함”에 허탈해하고 있을 다음날, 북미정상은 합동기자회견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프로세스의 중간역 통과를 발표하게 될지도 모른다. 북미간 국교정상화를 위한 사전단계인 북미 연락사무소를 평양과 워싱턴에 각각 설치하겠다는 발표가 이어질지 모르고, 북한의 핵무기를 어떤 절차에 의해 폐기절차를 밟을 것인지에 합의하였음을 발표할지도 모르고, 남북간경협이나 남북철도나 육로 건설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를 밝히고, 대북경제제재를 어느 한도까지 풀어줄 것인지를 밝히는 등 희망의 언어가 노래될 것이다. 아주 극명한 상황이 같은 날 전개될 것이다. 시대를 읽지 못하고,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을 좌빨 광주시민들의 폭동이었다거나, 피해유공자들을 세금을 축내는 괴물집단이라거나, 우파들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비겁하게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한다거나 하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헌법재판소에서 이미 확정되어 수사를 통해 기소되고 25년 이상의 장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재판 중에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범죄혐의가 밝혀진 게 없는데도 탄핵이 이루어져 탄핵절차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는 정견발표를 하며 태극기를 앞세운 극우세력의 환호를 전국민의 지지로 착각하는 망상에 빠져 있음은 코미디 중의 코미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언어는 화자의 감옥이다. 문효치 선생의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라는 노랫말의 아름다움과 정치인들의 저 상스러운 저주의 언어들이 극명하게 대치되는 오늘, 누구는 천국이라는 감옥에 갇힐 것이고, 누구는 지옥이라는 감옥에 갇힐 것이다. 모두들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언어 사용에 완전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러기에 더욱 더 언어에 신중해야 하는 까닭이다. 북미정상회담이 끝나면 바로 그 다음날은 3ㆍ1절 백주년이다. 남북간에 공동으로 백주년 기념행사를 크게 마련하고 있는 모양이다. 남북화해의 시대에 순결한 항일운동의 표본이라 할 3ㆍ1 독립운동과 이에 이어 상해임시정부수립을 통한 상시적인 독립운동을 우리 모두 기념해야 할 것이다. 최근 들어 일본 아베 정권의 초점 잃은 대한(對韓)정책이 갈팡질팡이다. 여태 남북 갈등 구조를 악용하여 일본 국내 정치를 조작하여 왔던 아베 총리로서는 남북화해무드와 북미화해무드로 인해 조성된 평화구조 속에서 “자신들의 조작 기준점을 상실”함으로써 국내 조작질이 불가능하게 되자 휘청거림이 극에 달하고 있다. 그래서 위안부사죄나 독도순시선문제 및 문희상 국회의장의 일본국왕의 사죄 발언을 통한 한일화해시대의 도래 등에 대한 선의 앞에 거의 발광 수준의 발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들 언어에서 선점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발생하는 실패현상이다. 언어는 화자의 감옥이다. 선한 인격 속에서 선한 언어가 나오고, 선한 언어가 선한 탑을 쌓는다. 각자 짓는 감옥이 멋진 성일수도 있고, 역한 지하감방일 수도 있다. 문득 안정옥 시인의 시집 “그러나 돌아서면 그만이다.”가 생각난다. 모두들 잘못되었다 생각하면 안 시인이 속삭이듯 그냥 돌아서면 된다. 죽은 언어를 사용하는 이가 돌아서고, 죽은 정치를 하는 이가 돌아서고, 무간지옥을 향한 악한 언행으로부터 돌아서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쉬운 것은 행하려면 그렇게 어렵다. 그래서 돌아서지 못하고 더 멀리 깊게 빠져 들어간다. 이안삼 작곡의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를 한 번 감상하였으면 한다. 참 좋은 가곡이다. 노랫말 못잖게 고품격 작곡의 가곡이다. 마음에 맑고 깨끗함을 간직한 채 수많은 촉수를 뻗어 없는 이와 약한 자를 사랑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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