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전쟁, 민주주의, 휴머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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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전쟁, 민주주의, 휴머니티
  • 법률저널
  • 승인 2011.02.11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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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베리타스

선거는 민주적인가?1)

이번 시간에는 선거와 관련된 주제를 다룬다. 정치학적으로 오래된 이야기지만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주제를 다룸으로서 정치에 대한 이해를 확대해보자.

우리는 대의민주주의에서 대표를 선발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선거와 투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선거는 대표를 선발하는 방식이고 이런 선발방식은 무엇이 다수의 견해인가를 결정하는 것과 함께 더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선발하는 방식인 선거는 과연 민주적일 수 있을까? 앞에서 본 것처럼 선거에서 누가 다수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절차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누가 다수를 구성하는지는 권력의 연원이 어디 있는가의 문제이다. 즉 정부와 대표가 정당성을 가지기 위해서 유권자로부터 얼마나 더 많은 동의를 받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이처럼 다수의 지배는 민주주의를 절차적인 수준에서 이해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다수의 지배 원리에 대해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 즉 다수가 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가치를 지켜내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리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소수의 보호를 가능하게 해주는 자유주의의 원리들에 의해서 가능하다. 즉 ‘법을 통한 지배’와 ‘기본권에 대한 보호’라는 자유주의의 법치주의가 가지는 방어적 기능에 의해 달성된다. 즉 우리는 구조적 소수가 될 수도 있는데 이때 우리의 최소한도의 자유와 가치를 보호받아야 한다. 이것을 자유주의자들은 ‘자연권’이라는 표현을 써서 옹호하고자 했다.
  
이런 법치주의에 의해서 보호 받는 신성불가침의 권리 이외에 민주적 결정방식에 의해 소수가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다수결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방식’과 ‘합의를 통해서 결정하는 방식’이 있다. 먼저 최소한도의 소수를 보호하기 위해서 소수에게 더 많은 결정의 가중치를 부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투표자의 2/3에 의해 무엇인가를 결정할 수 있다면 이는 1/3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2/3에 달하는 사람과 같은 결정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투표자의 3/4에 의해 결정된다면 이는 1/4의 수를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와 결정권이 3/4의 결정권과 같아지기 때문에 민주적 결정권에 있어서 동등성을 깨뜨린다. 가장 극단적으로 만장일치를 사용한다고 가정하면 한사람의 의견은 다른 나머지 사람의 의견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민주적 결정과정에서 소수를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다시 잘 들여다보면 소수의 기득권을 가진 사람을 만들 수도 있다. 이들은 작은 수를 통해서도 자신들의 이해를 지킬 수도 있다. 따라서 이것은 민주주의의 ‘다수의 지배와 결정’을 무효로 만들 수 있는 ‘소수의 지배’기 될 수도 있다.

다른 방법으로 참여자들이 동등하면서도 다수의 결정과 소수를 보호할 수 있는 방식은 ‘합의제(consensus)방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모든 참여자들이 합의점에 도달했을 때 결정을 마치는 방식은 누구도 거대한 불만을 가지지 않게 만들면서 사회적 결정에 도달하게 한다. 이런 합의제 방식은 협의민주주의에서 사용된다.

선거의 두 번째 기능을 보자. 선거는 더 뛰어난 사람을 뽑는 것이다. 선출되기 위해서 자신이 사회의 대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표는 재력이나 지력이나 덕성에서 다른 이들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 선거는 더 나은 사람을 선발하기 위한 방식으로 이는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평등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더 뛰어난 엘리트에 의한 권력의 지배와 사회에 대한 지도가 선거의 핵심이다. 그래서 버나드 마넹이 주장한 것처럼 이들은 ‘민주주의의 귀족들’이 되었다. 선출된 대표들은 선출하는 사람과는 사회적으로 다른 탁월한 시민이며 또 그런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뚜렷한 자각 속에서 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대의민주주의와 대의정부가 제도화 된 것이다. 마넹은 이를 “탁월성의 원칙(principle of distinction)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이 생긴다. 17세기를 넘어 18세기로 들어오면서 대의민주주의가 만들어질 때 대의민주주의에서는 이런 탁월성의 원리를 강조하면서 선거자체가 불정하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부분보다도 공직을 분배하는데 불공정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누구나 시민으로서 자신이 권력을 가지고 정부의 중요업무를 수행하거나 사회적 가치를 결정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이런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공직에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의민주주의의 논리가 발전하면서 공직을 가지고자 하는 시민들의 욕구를 공정하게 반영해야 한다는 인식은 사라졌다. 그러면 이들의 공직에 대한 열의는 무엇으로 대체되었는가? 그것은 선거에서 동의할 수 있는 동등한 권리에 집중되었다. 즉 절차적으로 평등하게 결정권을 부여 받는 것으로 공직에 대한 열의는 대체된 것이다. 즉 나는 사회적으로 권력을 가지고 통치를 해보겠다던 열망은 나를 대신해서 통치할 사람을 선발하는데 있어서 나에게도 동일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권력의 분배에 대해 가장 민주적인 방식을 택했던 정치치제는 고대그리스의 아테네이다. 아테네에서 직접민주주의가 중요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민들 전체에 의해 결정되는 민회가 항상 모든 권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주요한 권력은 더 작은 단위의 집정관들과 같은 행정직에게 넘겨져 있었다. 그런데 이 행정직 700명중에 600명이 추첨을 통해 선출되었다. 이들은 제비뽑기를 통해서 선출되었고 1년의 임기를 가졌다. 기원전 4세기의 아테네 시민은 2만 명 정도였고 이중에서 아티미아(atimia : 시민권의 박탈)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든지 행정직에 취임할 수 있었다. 추첨에 당첨된 시민은 직무수행 전에 심사를 거치기는 했지만 이 심사라는 것은 직무수행을 할 수 있는 법적 자격이 있는지와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만족할만한지와 납세실적과 군복무를 마쳤는지 정도에 그쳤다. 즉 그의 능력을 따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테네에서 선거가 아닌 추첨을 통한 방식으로 관칙을 뽑았다는 것이 어쩌면 무지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들도 추첨에 따른 ‘운에 의한 지배’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테네인들은 선거를 통해 전문가를 뽑는 정치제도들-예를 들어 군과 관련된 전문분야는 선거를 했는데-이 가지는 장점도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 가지는 전문가주의의 문제점 역시 알고 있었다. 아테네 민주주의자들은 선거가 가지는 문제점 특히 공동체를 붕괴시킬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추첨에 의한 선발은 아테네 민주주의 최고의 원리인 이세고리아(isegoria: 민회에서 발언할 수 있는 동등한 권리)와 유사한 결과를 나았다. 그것은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민회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 동일한 몫을 주었다. 따라서 추첨은 관직을 원하는 사람에게 관직을 얻을 수 있는 동일한 확률을 보장해준 것이다. 그리고 아테네의 추첨의 원리는 로마시대에도 이어져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1797년 공화국이 몰락할 때까지도 추첨을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왜 공화주의의 전통인 추첨이 사람지게 된 것일까? 제임스 메디슨(J. Madison)이나 아베 시에예스(E. Sieyes)같은 대의이론가들이 이 부분에 기여했다. 마넹에 따르면 이들은 공화정이라는 용어를 써서 자신들이 만들고자 했던 정치체제를 민주정과 구분했지만 이들이 공화정이라고 한 정치체제의 특징은 집단으로서 인민의 참여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었다. 매디슨은 선거로 선택된 시민을 통해서 대중들의 견해를 걸러내고자 했다. 즉 대중들은 믿기 어렵지만 현명한 대표가 대중의 견해를 잘 분별할 것이고 진정으로 공익이 무엇인지를 판별할 것이라고 보았다. 시에예스는 상업화가 진행되는 세상에서 정치영역은 정치전문가에게 맡기고 대중들은 자신의 생계문제에 관련된 경제문제에 모든 시간을 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함으로서 민주주의는 대표에 의해 주도되고 시민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 주체로서가 아니라 한 표를 던져주는 것에 만족하고 사는 그저 수동적인 객체로 남게 된 것이다.

현재에 와서 선거의 문제는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재조명되고 있다. 과연 선거라는 방식이 민주주의에 타당한가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들고 말이다. 선거가 부자(富者)와 현자(賢者)와 덕자(德者)를 뽑아서 이들 전문가에게 정부를 맡기는 것이라면 과연 이들이 그러한 자격을 가졌다고 평가하고 이들에게 권력을 맡기는 것이 우리가 동등하게 정부에 참여하여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더 나은 결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현재 한국 정부정책결정자 중에 얼마나 많은 재산보유자(富者)들과 박사학위소지자(賢者)들이 정부에 있는가를 따져보면 과연 전문가에게 맡기는 정치가 평범한 덕을 갖춘 촌로에게 맡기는 것 보다 더 낫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메디슨이나 시에예스의 주장처럼 자기 일이나 열심히 하고 정부 일은 관여안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면 대표를 통해서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것은 과연 가능하겠는지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대통령을 추첨으로 뽑을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국회와 지방정부를 구성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최소한의 권력이 부여되는 곳과 최소한의 책임이 부여되는 곳에 추첨 제도를 사용해 보는 것은 사람들의 민주주의와 권력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공화주의입장에서 이는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키게 될 것이다.

각주)-----------------
  마넹의 논의를 중심으로 재구성했음. 마넹,『선거는 민주적인가』,(서울:후마니타스,,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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