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W & JUSTICE] 작가 정재민의 고독한 독서록_ 「10과 1/2장으로 쓴 세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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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 & JUSTICE] 작가 정재민의 고독한 독서록_ 「10과 1/2장으로 쓴 세계역사」
  • 정재민
  • 승인 2018.06.23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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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민 작가
전 판사

※ 이 글은 법조매거진 <LAW & JUSTICE>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처음 제목을 보았을 때 의아했다.
아무리 줄리언 반스가 현재의 영국을 대표하는 대단한 작가라고 해도 ‘세계역사’를 내세우는 것은 무리수가 아닐까. 어찌 세계역사라는 거대한 주제를 한 권의 소설에 담아낼 수 있다는 말인가. 잠자리채로 코끼리를 포획하겠다거나, 낚싯대로 고래를 낚겠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읽어 보니 과연 세계역사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과 짐승, 섹스와 살인, 폭력과 정의, 바다와 우주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도 테러리스트, 군인, 예술가, 종교인, 정신병자, 귀신, 좀벌레의 시선으로. 불안, 희망, 공포, 유머, 이완, 갈망, 비겁, 사랑, 정욕, 호기심, 진취, 익살, 부조리, 위선, 정의 등 인간의 모든 감정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서사도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하다. 노아의 방주에 올라탄 좀벌레 이야기(1장), 이스라엘 처리 문제에 항의하는 아랍 테러리스트의 인질극(2장), 좀벌레와 성직자들이 공방을 벌이는 중세 종교재판(3장), 체르노빌 사건 이후 핵전쟁의 공포에 시달리는 여성이 고양이를 데리고 쪽배에 타고 바다를 표류하는 이야기(4장), 뗏목 위에 표류하는 사람들이 인육을 먹으면서 살아남은 이야기(5장), 우주선을 타고 달에 갔던 우주인이 귀환해서는 노아의 방주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9장) 등이 열거된다. 이 세상을 힘들게 만드는 문제들 중 여기에 안 걸리는 문제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이렇게 서로 이질적인 열편의 이야기들이 각각 다른 형식과, 인칭과, 주체와, 기술방식을 동원해서 콜라주처럼 무질서의 질서를 이루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적 실험이 한창 유행하던 1990년대 초반에 나온 작품답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사실 나는 오래 전부터 냉소적인 인간관을 품고 있다. 물론 인간은 우주선을 쏘아 올리거나 불치병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처럼 때로 위대한 성취를 이루기도 한다. 정의의 깃발을 치켜들고 불의를 소탕하기도 한다.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사랑의 행위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인간이 대부분의 시간을 먹고 살고 생존하는데 허비하고 그밖에 남는 약간의 짜투리 시간을 별 의미 없이 빈둥거리다가 금세 늙어 죽는다고 믿는다. 무엇인가 근사한 일을 해내기에는 너무 약하고, 빨리 늙고, 마음도 변덕이 심하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어보면 그마저도 내가 인간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뗏목 위에서 표류하던 일단의 사람들이 배가 고프니 한 사람씩 죽여서 인육을 먹었다는 이야기도 실제 역사이다. 이 소설에는 인간의 별 볼일 없는 밑바닥을 보여주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시되어 있지만 무엇보다도 참담하고 끔찍한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침팬지 부모와 자식을 뜨거운 불판 위에 가열하면 부모가 살려고 자식을 바닥에 놓고 밟고 올라가게 되더라는 실험 이야기.

고통스럽고 씁쓸한 세상의 비극과 부조리들이 전시되는 1장부터 9장까지와는 달리 10장은 천국을 묘사한다. 천국에 간 주인공은 원하는 만큼 뛰어난 실력으로(18홀을 50타로 끝낸다) 골프를 치고,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히틀러, 셰익스피어, 마르크스, 존 레넌, 찰리채플린, 마를린 먼로)을 다 만나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면 언제든 사귀고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섹스를 할 수도 있다. 아무런 고통이 없다.

그런데 천국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그 고통이 없는 상태가 너무 지루해서 고통스럽다. (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법률가들이 오래 버틴다고 한다. 원래 지루한 일을 꾹 참고 잘 하는데다 천국에서도 옛날 소송기록들을 다시 보면서 시간 때우기를 잘 한다고.) 그래서 자살을 모색한다. 재미없는 천국과 재미있는 지옥 모두 인간에게는 고통이다. 그것이 세계역사이고 인간의 숙명이다.

줄리언 반스는 소설 속의 ‘삽입장’을 통해서 자신의 역사관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세계의 역사? 어둠속에서 메아리치는 목소리, 몇 세기 동안 불타다가 꺼져버리는 이미지들, 때로는 중복되는 듯한 옛 이야기들, 이상한 연관, 부적절한 관련들일 뿐이다. 우리는 매일 거품 같은 뉴스를 팔에 방울방울 주사 맞으며, 현재라고 하는 병원에 누워 있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 얼마나 오래 입원해 있지 않으면 안 되는지도 전혀 모르면서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붕대를 감은 불확실한 생활 속에서 초조하게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우리는 우화화 한다. 우리가 모르고 수락할 수 없는 사실들을 호도하기 위해 이야기를 꾸며낸다. 몇 가지 진짜 사실을 남겨 놓고 그 주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우리의 공포와 우리의 고통은 마음을 달래주는 우화화에 의해서만 덜어진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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